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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들임 (B면은 기존 한국 작곡가들의 노래나 이선희의 J에게 등을 리메이크 - 1집 실패를 맛본후 나름 한국 시장과 타협한 지점으로 추측) 그리고 양준일이 다시 한국 시장에 오기 전, 한국의 대중가요판 역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 * 92년 한국 가요계 변화 90년대 초반~



활동하던 2인조 백댄서로 1기는 구준엽, 강원래(클론), 2기는 이현도와 김성재(듀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대중의 반응이 유해지고, 현진영과 와와는 후속곡 '슬픈 마네킹'으로 활동하면서 점점 인기를 얻게 되어 박남정의 라이벌로 급부상 하게 되지만 현진영의 대마초 혐의로 활동을 중단하게 됨. 현진영과 와와 - 슬픈 마네킹 여담이지만 이때 현진영이 쓰고나온 헤드셋 마이크가 대한민국 최초임ㅋㅋㅋ이수만의 안목 이외에 댄스 가수는 아니지만 1990년 심신이 권총 춤으로 유명한 '오직 하나뿐인 그대'로 큰 인기를 끌었고





후반 우리나라 남성 솔로 댄스계는 박남정이 지배하고 있었음. 데뷔 전부터 이태원 외국인 클럽 등에서 춤으로 이름을 날린 박남정은 노래실력과 작사작곡 실력 역시 뛰어나 싱어송라이터&댄서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됨. 마이클 잭슨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고 불리기도 했음 박남정- 널 그리며 이때 이수만은 외국인 클럽에서 춤으로 유명했던 현진영을 발탁하여 데뷔시킴. 이때 내놓은 노래는 홍종화 작곡가의 '야한여자', '슬픈마네킹' 등으로 기존의 댄스 음악이 띠고 있던 소위 말하는 '뽕끼'를





연이어 초대박을 쳤고 비슷한 장르였던 양준일의 2집은 묻히게됨. 서태지, 현진영 두 가수의 곡들 모두 뉴잭스윙 비트와 힙합 문화를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었고 이들은 수준급 댄스와 패션까지 선보이면서 한국 대중의 취향을 저격했음 서태지 오버핏 패션, 롱코트, 택 안떼고 입기 등 유행 현진영 크로스컬러스 후드티, X세대 유행 양준일표 뉴잭스윙 음악과 서태지, 현진영의 음악의 차이점을 따지자면 서태지, 현진영은 한국적인 정서를 조금 가미해서 높아진 대중들의 음악적 취향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정서적으로 다가가기 쉬웠다는 점을 꼽을 수



슈가맨 김원준 보면서 슈가맨 김원준.ㅋㅋ 양준일이 뜨지못한 진짜이유 - 90년대 가요계 상황과 함께 알아보기 김원준은 정말 그대로네요. 슈가맨 김원준이면 슈기송 쇼vs 모두잠든후에 오늘 슈가맨 김정민에 이어서 김원준인가봐요 슈가맨에 김원준 김정민썰이 있네요.jpg 슈가맨에 김원준 나왔는데 우리 초딩 왈 슈가맨 김원준은 더 젊어졌네요 슈가맨 김원준... 오늘 슈가맨 설마 언제나 부른 김원준 아닌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 것임. 양준일은 1집의 퀄리티와 사운드에 회의감을 느끼고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음악을 준비하게 됨 미국으로 귀국한 양준일은 재능있는 흑인 음악 프로듀서들을 쫓아다니며 아침부터 운전해주고, 쇼핑 도우미 역할까지 해가며 음악을 배우게 됨 (출처 : 슈가맨 방청 후기 - 방송에는 잘림) 흑인 프로듀서들과 콜라보 작업 끝에 나온 음악들이 바로 양준일 2집의 A면을 채우고 있는 뉴잭스윙





있음. 반면 양준일의 음악은 좀더 본토에 가까운 스타일이었고 여기에 양준일이 본인의 모국어인 영어 위주로 가사를 쓰게 되면서 한국 대중의 귀와는 거리를 두게 됨. 당시 방송 영상을 보면 '가사를 영어로 쓰셨다고요?' 라는 질문이 매우 많이 등장함. (어느 곡이 더 세련됐다거나 이런것은 개인의 기호이므로 서술하지 않음) 양준일 - 댄스위드미 아가씨 서태지 - 난 알아요 현진영 -





IMF 전까지 우리나라는 경제 호황기를 맞으며 새로운 문화, 신문물 등의 유입이 매우 활발했음. 당시 문화 주 소비층이 여러가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장르의 언더그라운드 판이 형성되었고 대중의 듣는귀 수준도 올라가 있는 상태였음 (언더그라운드=지금으로 치면 인디를 당시엔 이렇게 말했음) 새로운 음악으로 한국시장에 재도전하는 양준일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음 양준일은 1992년 11월 2집 '댄스위드미 아가씨', '나의 호기심을 잡은 그대 뒷모습'





(강수지와 공개열애 후 헤어진짤로 유명하신 그분 맞음) 1990년 11월 데뷔한 신승훈이 1991년 초까지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1위를 석권하는 등 남성 솔로 가수계는 나름 치열했음 * 1991년 양준일의 데뷔 양준일은 같은 미국 교포 출신인 이현우와 1991년 데뷔 동기였음 두 사람은 같은 교포였지만 이현우는 한국어를 잘했고 단정한 외모에 대중의 취향에 맞았던



발라드로 정상을 찍은 반면, 양준일은 당시 기준 다소 튀었던 외모와 패션, 여기에 한국어를 잘 못한다는 것 때문에 대중의 반응이 비호에 가까웠음 지금 보면 괜찮아 보이는 문제없는 모습이지만 당시 대중들이 보기에 양준일은 다소 중성적인, 튀는 이미지였다고 함. 이때문에 '호모같은 놈', '나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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